엄마는 목욕간다

                          작자미상 김태형

이십년 된 사전은
나보다 너덜거리지만
속살이 하얗다
애옥한 삶의 그 안쪽처럼

학림(鶴林)이란 말을 찾으려다
홀딱 맨 뒤로 넘어간 사전
스르르 눈깜짝할 사이
그렇게 달력처럼 넘어갔다

낯선 어머니 글씨
하필이면 어머니는
그 무거운 사전뚜겅에
길지도 않은 메시지를 눕게 했나
내 안구를 후비는
낡은 초록색 유언
어머니 무덤 색깔
그 초록은
이미 그 곳 잿 빛 갱지에
아스라히 스며있었다.
<엄마는 목욕간다>고

한기(寒氣)스러진 어느 날
너덜거리는 육신을 끌고
엄마는 진짜 목욕을 가셨다
어머니,
바람을 퍼서 끼얹는 소리에
맑게 흔들리는 잡초를 보면
아직도 목욕이 끝나지 않았나보다
석가가 입멸(入滅)한 숲
그 곳 鶴林에서...

사전을 넘기면
이제 물소리가 난다
수많은 아우성 물리치고
맨 뒷장에 남은
어머니 삶의 잔해(殘骸)들이
언제나 그렇게 외치기에
<엄마는 목욕간다>고.


- 대학 1학년 2학년 이던 먼 옛날 국문과 유혜숙 교수님의 시창작 수업에서 들었던 시다.
시는 참 놀라운 힘을 지녔다. 단지 몇글자만의 글들로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니 말이다.
일상에서 생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들이 시인한테는 '바람을 퍼서 끼얹는 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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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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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민지아빠 2008/11/13 02:13  Modify/Delete  Reply  Address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곳에서야 찾았습니다..
    예전에 유니텔에 문학동호회(97년)가 있었는데..그곳 동호회원중 한 분이 본인의 자작시를 게시판에 올려주셨습니다..그 여러편중의 한 편이 이 "엄마는 목욕간다"는 시였는데..너무 맘에 와닿는 시라서 한글파일로 옮겼는데..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제목만 어렴풋이 기억날뿐 내용을 찾지 못해 너무 가슴아파하고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줄이야...

    그 시인의 이름은 "김태형"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정식으로 등단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유니텔 문학동호회원들은 다 알겁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김태형시인이라는 동명이인이 계시는데 그분인줄 알고 방명록에 여쭈었더니 아니라고 하더군요.. 너무 기뻐 눈물이 나려 합니다..

    오해와 불법의 소지가 있다하더라도 염치불구하고 이 시좀 퍼가겠습니다..
    네이버에 "인연"(민지아빠)라를 블로그에 옮기겠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날개 2008/11/13 15:42  Modify/Delete  Address

      이 시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분을 만나게 되니, 기쁘면서도 가슴 뭉클함이 밀려옵니다. 10년도 더 된 일이라 시인의 이름도 시의 출처도 완전히 잊어버렸었는데 민지아빠님의 글을 읽으니 '김태형'이란 이름과 PC통신에서 옮겨온 것이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려하네요...
      그러고 보니 대학 1학년이 아니고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한 남다른 사연을 갖고 계신 민지아빠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