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10점
진은영 시인. 작년 겨울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만났다'에 일반적인 만남의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적절치 않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만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첫 만남은 "기억과 망각의 아고니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어주는 강의실에서 였다. 이후로 두 권의 책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와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는 사이 연두빛 여린 봄도 봄바람 처럼 가벼이 실려 날아가고, 제법 세찬 빗줄기들를 쏟아낼 역량을 지닌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다. 나는 그 여름의 문턱에서 덜컥 그녀의 이름이 박힌 두 권의 시집을 샀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과 <우리는 매일매일>.
나... 아무런 풍문도 없이 시인의 이름만 보고 이렇게 손 수 시집을 사서 손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그 어렵게만 느껴지던 칸트, 니체,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매우 친절하게 들려주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상상이 가득한 이 시 한편을 발견한 것이다.




         견습생 마법사

                                       진은영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나무

내가 만든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이브는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다, 잠이든다
에덴 동산의 시간에 출현한 무릉도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윌리엄 텔은 아들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해방된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왕비는 여전히 질투심에 불탔지만 한 알의 사과를 구하지 못했네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맑은 밤, 들에 나가면 목성의 주황색 얼음띠가
예쁜 팔찌처럼 선명하네

그래도 세잔은 한 알의 복숭아로 빛의 마술을 부렸겠지
프로스트는 복숭아를 딴 후에 한 편의 시를 완성했을 거야

트로이 전쟁에 쓰려고 준비해둔 한 알까지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
빈 사과 궤짝을 타고 나는 도망가야겠다
하느님이 돌아오시면 화내며 세상을 멸망시키실까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http://www.kh7777.net/tt2009-06-02T13:37:4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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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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